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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지사 박종민과장 기고문(금강산의 길목, 철원)
  • 작성부서|철원지사 농지은행팀
  • 작성자|이춘미
  • 등록일|2009-03-04
  • 조회수|266
게재일 2009-02-25 관련사업 고객만족
사이버 홍보 노출 여부 미노출 보도실적 등록 여부 미등록

겸재와 철원 조금은 뜬금없고 약간은 난데없다 조선팔도의 그 많은 명승을 두고 조선산수화의 대가였던 겸재가 어떤연유로 내고장을 찾아와 그림을 그렸을까? 그러나 이런 생각은 철원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굳이 이유를 든다면 철원따을 휴전선아래로만 국한해 반세기 이상 보아온 분단 세대니 그러할 테고 또 하나는 민통선이라는 지역 특성상이라는 약발이 먹혀 이북 땅과 연결된 교통 지도조차 볼 수 없음이리라. 그러기에 한국 전도를 펼쳐놓고 살피려는 정성이 없은 한, 작품 배경을 알 까닭이 없으니 당연히 겸재의 철원 기행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철원읍은 동해안의 간성과 위도가 비슷하다. 간성은 산은 하나인데 이름이 둘이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금강산 관광의 유일한 전진기지로서 일익을 감당하고 있다. 하나는 내륙의 내금강이고 다른하나는 동해의 외금강이다. 그런 만큼 남쪽의 접근로 역시 두 곳인데 그 포스트는 철원과 고성이었다. 남북이 분단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이두 루트로 금강산을 찾았다. 1931년 금강산 전기철도(철원~내금강)개통 후 분단 직전까지는 기차가 관광객을 실어 날났고 고성의 건봉사는 금강산행의 관문이었다. 겸재 생전인 조선 후기 18세기도 상황은 그리 많이 다르지 않았다. 당시 한양에서 금강산을 가자면 포천을 거쳐 철원을 경유하는 루트가 가장 짧고 빨랐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해가 쉽다. 이런 연유로 겸재는 금강산 길목에서 '삼부연도'와 '정자연'도 그리고 '화강백전'을 탄생시켰다. 철원의 명성산 중턱에 자리잡은 삼부연 폭포. 물은 높이 20m의 절벽 바위에서 3단계로 추락하며 세 개의 용소를 만들고 그 용소가 마치 솥 처럼 보인다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는 폭포 자체만 벼랑사이를 뚫고 계곡 아래로 떨어질 뿐 그 근원이 되는 물줄기는 벼랑 위까지 완만하게 평지를 타고 내려온다. 이런 신선세계와 같은 고장을 진경문화 창달을 모색하던 삼연 김창흡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겸재가 4살 때인 숙종 5년(1679)7월, 삼연은 27세의 나이로 전가족 데리고 이곳에 은거해 살기로 결심하고 용화동으로 이사해 온다. 여기에서 그는 주역 연구에 몰두하며 진경문화 창달을 모색하니 세상에서 그를 삼연아러 부르게 되었다. 삼연은 물론 삼부연을 상징하는 별호였다. 이렇듯 삼부연이 진경문화의 요람이되고 보니 이후 진경문화계의 중추를 이루던 삼연 제자들은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고 그림을 그려 이를 기리게 된다. 이 삼부연도도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명성산 자락의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은 삼부연 폭포에서 용화천을 타고 내려와 읍내의 목마름을 채워주고 경작지를 돌아서는 풍년 뜰을 적셔준다. 이럴 즈음 금강산 기행에 나선 겸재는 포천 영중면을 거쳐 그의 스승 김창흡이 머물고 있던 용화동 계곡을 찾았고 삼부연도를 그렸다. 또 한점은 금강산 가던 철길 하류지점의 절경이 한탄강 그림 배경과 일치하는 점으로 보아 그는 용화동을 떠나 정연팔경의 명소였던 철앙정에서 또 한점을 화폭에 그려 넣었으니 이것이 바로 한탄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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